2023. 12. 17. 22:22ㆍ먹거리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단어가 주는 느낌도 있지만
늘 이맘때면 연말을 보내는 우리네 기분은 뭔가 뒤숭숭하면서도 아쉽고 설레는 감정이 교차하는 것 같다.
12월, 어느 주말
지인들과 모임을 갖기 위해 내 고향 부산을 찾았다.
오랜만에 기차를 통해서 부산으로 이동했는데, 참 많이 바뀐 부산역의 모습에 조금은 낯설어하는 내 모습이 있었다.
지금의 통유리로 된 부산역은 2003년에 만들어진,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완성된 모습인데 지금 봐도 참 이쁜 부산역이다.
그런 부산역의 광장이 복층으로 바뀌면서 곳곳에 화단도 있고 또 지하로 이어지는 길을 만들어 이동을 편이하게 해뒀다.
뭔가 옛것은 없어지고 새롭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이런 모습도 조금은 낯설고 설레고 아쉬운 모습인 것 같아 왠지 쓸쓸했다.
부산역 광장을 가로질러 횡단보도를 건넜다.
12월 초였지만, 한 낮 기온이 20도를 오르내리는 따뜻한 겨울 날씨의 부산이었다.
아무리 부산이 따뜻한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12월의 20도가 말이 되는 날씨인가?
이 마저도 35년을 부산에서 살았던 나에게 많이 낯선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부산역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할 것 같았는데
뭘 먹을까 쉽게 결정이 되지 않았다.
돼지국밥을 먹자니, 너무 뻔한 메뉴선택인 것 같고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렇게 좋아하는 돼지국밥이 오늘은 먹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저기 CU가 있었던 자리가 뭔가 어색했다.
간판이 새것처럼 보인다 생각했는데, 아차,
저기에 원래 보리밥집이 있었는데 편의점이 들어서면서 가끔 찾아가던 보리밥집이 없어진 것이 보였다.
내가 어릴때부터 가끔 찾아가서 먹던 보리밥이었는데,
주변의 다른 보리밥집이 하나 둘 없어질 때도, 시절을 견디며 버티던 보리밥집이었는데
기어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가게 문을 닫고 그 자리에 CU 편의점이 들어섰나 보다,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부산역, 초량을 찾은 내가 갑자기 여러 가지 변화된 모습에 아쉬움을 삼켜야 하는 것이 슬펐다.
그래서 그런지 보리밥이 더 먹고 싶어졌다.
점심으로 근처에서 보리밥을 먹자 맘을 먹었다.
그런데 네이버 지도로 검색을 했을 때 딱히 보리밥집이 검색이 되지 않았다.
골목을 돌아 숨은 밥집을 찾아보자 싶어서 CU편의점을 끼고 초량의 옛 골목,
차이나타운이라고도 하고, 어릴 때는 텍사스거리라고도 불렸던 그 골목을 걷기로 했다.
점심시간이었지만 보통 저녁 장사를 하는 가게가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게가 문이 닫힌 채로 나를 맞아 주었다.
그렇게 골목을 들어섰을 때,
불 꺼진 상점들 사이로 저기 멀리 보리밥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금호 보리밥
어쩐지 금호라는 상호도 낯이 많이 익는 것 같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아서 근처에 보리밥집이 없을 줄 알았는데
코너를 돌자 만난 보리밥집에 너무나 반가워서, 멀리 가지 않고 저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만난 간판과 가게의 외관이 너무나 익숙했다.
금호 보리밥.. 금호 보리밥..
혹시 이 보리밥집이 예전 큰 길가에 있던 그 보리밥집이 아닐까?
CU편의점이 있는 자리에 있던 그 보리밥집,
아마 비싼 임대료가 너무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혹은 도시 정비 사업으로 어찌저찌한 이유로 장소를 옮긴 것은 아닐까?
궁금한 마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53년 전통의 금호 보리밥
아무래도 내 추측이 맞다면 이 가게가 내가 자주 가던,
오늘 내가 찾던 그 보리밥집이 맞는 것 같다.
가게 안으로 들어섰는데 식탁과 인테리어가 많이 눈에 익었다.
그리고 시그니쳐 메뉴인 보리밥, 시락국, 소고기국 같은 메뉴들이 보이는 것이,
거의 확신이 들게 만들었다.
가게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없나 싶은 찰나에
부엌에서 아주머니가 나와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보리밥 한 개요!
구석 자리에 짐을 놓고 보리밥을 주문했다.
그렇게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내가 찾던 그 보리밥집이 맞았다.
이전에 가게를 찾았을 때도 보리밥만 먹으러 왔던 터라 '금호'라고 하는 상호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주인아주머니를 뵈니 내가 가끔 와서 보리밥을 먹던 그 보리밥집의 보리밥이 맞았다.
다시 만난 그 보리밥집,
오늘 많이 낯선 부산역과 길거리 모습 중에서 그나마 참 반가운 보리밥집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이곳 초량에서 나오기도 했고
부산에서 내가 일했던 직장의 사무실도 이곳 초량에 있었기 때문에 점심으로 가끔 먹었던 그 보리밥이었다.
그리고 서울 외근을 갔다가 저녁 늦게 부산역에 도착해서
늦은 저녁을 보리밥으로 먹고 집으로 갔던 추억이 많은 그런 보리밥이었다.
그런 보리밥이 사라지지 않고 있어 줘서 너무 고마웠다.
이곳은 보리밥 말고도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식사를 뚝딱 내어주는 식당인데
나는 보리밥 말고는 다른 메뉴를 먹어보지 않아서 맛이 어떤지 알 길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집 보리밥이 지금은 몇 남지 않은 내 어릴 적 전통 보리밥을 판다는 것인데
또 그 맛이 정말 기가 막혀서 서울에 살고 있는 지금도 가끔 이 집 보리밥을 먹으러 부산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날 정도다.
'전통' 보리밥이란 분류가 따로 있지는 않다.
그냥 잘 만들어진 보리밥과 진한 된장, 그리고 배추절임이 한상으로 나오는 보리밥을 나는 전통 보리밥이라 말하고 싶다.
그렇게 주문한 내 전통 보리밥 한상
나는 보리밥 소(小) 자를 주문했다.
53년 전통의 금호 보리밥
보리밥 (대) 8,000 원
보리밥 (소) 7,000 원
가격도 정말 저렴하다.
예전에는 식사를 하는 자리에 보리숭늉이 담긴 주전자가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컵에 따라 마시거나,
겨울이면 가게 안 구석 어디 난로위에서 숭늉을 계속 끓이고 있어서 먹고 싶을 때 언제든 떠서 마실 수 있게 해 주셨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숭늉은 없고, 물은 셀프(self)로 정수기에서 떠다 마실 수 있었다.
위생 때문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비용 때문이라면 보리밥 가격을 올려 받으셨으면 하는 맘이 생겼다.
보리밥에 숭늉, 참 포기할 수 없는 조합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보리밥
사진이라 이렇게 보여도, 소(小) 자지만 양이 적지 않다.
주문한 보리밥을 기다리면서 내 자리 앞에 있는 보리포대를 가만히 지켜봤는데
국산 보리쌀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보슬보슬한 식감이 살아 있는 보리밥을 맛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집 보리밥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는
앞서 얘기한 숭늉도 숭늉이지만 사실 이 된장 맛이 너무 좋아서, 이런 찐한 된장이 입맛을 돋우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정말 힘이 되는 맛과 향이 있는 된장인데,
여기에 무심히 던져놓은 유부 몇 조각의 식감도 참 좋은 된장이다.
이 된장의 반은 보리밥에 넣어 비비고,
나머지 반은 보리밥을 먹을 때 숟가락으로 떠서 부족한 간을 맞추기 위해 함께 먹는다.
사진으로 봐도 찰기가 살아 있는 고추장
이 고추장의 고추와 찹쌀 같은 재료가 국산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너무 맵지도 않고 그렇다고 밍밍하지 않은 맛에, 적당히 찹쌀이 들어가 찰기가 느껴지는 그런 날것 그대로의 고추장이다.
보리밥을 비빌 때 한 숟가락 떠 넣으면 깊은 보리 비빔밥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나머지 반찬들
고추된장무침, 배추절임, 미역줄기(미역쭐구지), 무생채, 콩나물, 그리고 오징어젓갈
내가 어릴 때 내 우리 어머니가 보리밥을 참 즐겨 드셨는데
부산의 앵간한 보리밥 맛집은 어머니 손을 잡고 참 많이 갔었더랬다.
서면, 부전동, 전포동, 남포동, 초읍, 그리고 사상과 냉정, 주례에도 갔었다.
(지금 우리 어머니 최애 음식은 된장찌개가 되었다.)
그때 갔었던 보리밥집의 식탁에는
늘 숭늉 주전자와 고추장 단지, 그리고 저기 배추절임이 넘치도록 담겨 있는 단지가 늘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고추장과 배추절임은 개인의 기호에 따라 얼마든지 떠서 비빌 수가 있었는데,
내가 예전에 찾았던 이곳 금호 보리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배추절임은 기본반찬으로 따로 내어져 왔다.
물론 배추절임은 필요하면 더 달라고 하면 되지만,
산처럼 쌓어서 비벼 먹던 배추절임의 그 모습이 떠올라서, 이 마저도 세월이 흘러 변해버린 모습인 것 같아 아쉬웠다.
이것도 위생 때문일까?
아니면 비용 때문일까?
정말 비용 때문이라면 가격을 올려 받으셨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주어진 반찬들을 모두 밥그릇에 넣고 산을 쌓았다.
여기에 된장을 넣고 고추장을 넣어 간을 맞추고는 최선을 다해 비볐다.
(미역쭐구지와 오징어젓갈, 풋고추무침은 반찬으로 곁들여 먹었다.)
비빔밥이 그렇듯,
보리밥도 먹는 방법이 딱 정해져 있지 않다.
내 입에 맞는 반찬을 넣고 된장과 고추장으로 내 입에 맞는 간을 맞춰 먹으면
그게 보리밥이고 비빔밥이다.
된장은 국물도 맛있지만
폭 삶아 고들고드한 콩들도 같이 먹을 수 있어 씹는 맛과 짭짤한 맛을 같이 맛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이 된장을 어찌 찾지 않을 수 있겠나
자다가도 생각나는 맛이다.
정말 맛있다.
콩나물도 아삭아삭 식감이 살아 있고
배추절임의 아삭함도 물컹한 보리밥과 함께 참 잘 어울린다.
그렇게 정말 맛있게 보리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반찬으로 곁들인 고추와 미역줄기도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오징어젓갈은 짜서 다 먹지 못해서 조금 남겼다.
그렇게 보리밥집을 나서면서 내 기억 속의 부산역과 초량, 그리고 금호 보리밥집 모습을 업데이트해 나갔다.
오랜만에 찾은 부산역과 초량은 내가 마지막에 봤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오래된 나의 추억과 맛을 찾을 수가 있었다.
변화에 아쉬워하기보다는 새로운 모습을 다시 기억하고 그 속에서 익숙한 것을 찾으면
바뀐 모습에 그렇게 슬퍼만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오래된 보리밥을 한 그릇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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